왕대왕인 류항이 황제로 있은후 23년, 기원전 157년에 사망하였는데 시호를 효문황제로 하였다.중국고대사의 일반적인 법칙으로부터 볼 때 왕조가 건립될 초기의 황제들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성과가 있었고 서한왕조도 례외가 아니였다.。
서한왕조는 끊임없는 동란의 토대우에서 건립된것이다.한나라 고조 유방이 강산을 함락하기 20여 년 동안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진나라의 폭정과 초한이 패권을 다투는 세 개의 격동의 시기를 거쳤다.서한 초기에 유방의 명신 소하, 장량 등도이 점을 보고 끊임없이 류방을 권고하였다.그러나 류방은 재위한지 10년도 안되였고 이성의 봉왕을 소멸하고 흉노인을 항격하는 전쟁을 끊임없이 진행하면서 원기를 회복하는 정책을 체계적으로 리행하지 못하였다.그후 려후가 집권하면서 궁정투쟁이 그치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휴식과 원기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할수 없었다.한나라 효문제가 왕위를 계승한후 천하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여있었기에 조정은 여유있게 민생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조정할수 있었다.이후 한경제 재위 18년은 한문의 정책 기조를 지속해 왔는데, 역사를'문경의 치 (文景之治)'라 함은 서한왕조의 200여년의 통치에 견실한 기초를 닦은 것이다。
한문제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원기회복정책을 드림 없이 집행한것은 그가 산서성에서 왕으로 된 경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서경잡기 (西京杂记)에 따르면 문제가 왕위를 대행할 때 진양 (晋양, 지금의 산서 태원)에 사현원을 세워 전문적으로 천하의 현인들을 초대했다고 한다.건축규모가 방대하고 내부장식도 중시하여 현인에 대한 사망과 중시를 증명하였으며 왕대왕의 부하인 장무와 송창이 바로이"사현원"에서 왔는지도 모른다.사실 한문제는 산서성에서 따라온이 두 부하들을 특별히 중용하였다.즉위 당일 저녁, 한문제가 송창을 위장군으로 임명하여 수도를 보위하는 남군과 북군을 관리하게 했다.또한 장무를 랑중령으로 임명하여 궁정의 내부사무를 책임지게 하였다.이 두 사람은 한집안과 한집안이어서 문제가 즉위초기 오른팔과 오른팔로 되였다.또 다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즉위했던 과정을 회고하면서도 나라를 대신해 따라온 공신들을 잊지 않았다.문제는"주살한 뒤 왕위를 받자 불안했다"며"승계를 반대하는 바람에 송창 중위만 내가 봉종묘를 지킬 수 있도록 권유했다"고 말했다.그러나 문제가 보기에, 반대와 찬성은 모두 충성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여섯 명의 주요 대신들은 모두 구경까지 벼슬을 하며 조중권을 장악했다.
한문제가 왕위를 계승한 이래 천하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내란도 드물었는데 이는 한고조가 재위했을 때보다 더 큰것이다.이는 이씨봉왕이 대부분 이미 소멸되였기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의 느슨한 정책과도 관계된다.한고조가 살아있을 때 여러 왕들의 반역행위는 때로는 반역자들의 정책야심이 작간한 것이기도하고, 때로는 조정에 대한 부당한 의심과도 관계된다.여하간 문제는 재위하였다. 대내외 전쟁이 매우 잦았기때문에 그는 여유있게 각 지방을 고찰할수 있었다.
한문제가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는 대외관계면에서 흉노와의 관계가 여전히 으뜸가는 대사였다.한고조 재위때 대신 류경력주가 흉노와 화친하였는데 비교적 좋은 효과를 보았다.려후가 정사를 주했을 때 원래는 흉노와 전쟁을 치르려 했지만 장령들이 동의하지 않아 부득불 화친하였다.문제가 즉위한후 계속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그러나 한문제가 3년 (기원전 177) 5월에 이르러, 흉노 우현왕은 섬서와 산서 북부를 침입하였다. 한문제가 승상에게 기병 8만 5000명을 집결시켜 흉노를 치라고 명령하였다.이 지역을 좀 더 안정시키기 위하여 한문제는 북쪽을 순시하고 진양으로 돌아왔다.
이는 한문제가 황위를 계승한 후 처음으로 진양에 돌아와 십여 일간 머물렀던 것으로 한 황제로서는 예사롭지 않은 행보로 문제의 고향에 대한 미련을 증명하고 있다.당시 사람들은 모두 발적의 땅, 사업이 시작된 곳이 향후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미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문제가 대지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졌던 것은 당연했다.진양에서 한문제가 먼저 대왕으로 있던 모든 구신들을 만났고, 공로가 크니 작으니 그들에게 상을 내렸다.둘째, 대국의 도읍인 진양의 주민에 대해서는 상징적으로 소고기와 미주를 하사하고 진양과 금도 (지금의 산서 기현) 두곳 3년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당조시기 주밀한 설법에 의하면 서한의 조세는 원래 아주 가벼웠다. 조세가 아주 경한데도 진양과 중도의 조세를 면제해야 했는데 이는 산서의 고지에 대한 문제의 감정을 더한층 설명해주었다.
그후 한문제는 또 여러차례 대지에 돌아왔다.때로는 직접 찾아오기도 하지만 많이는 기타 지방에 순시를 가서 전문적으로 대지에 에돌아가기도 한다.한편 한문제는 아들 4명을 두었는데 장자가 태자로 그 뒤를 이은 한경제, 차남 류무, 3 남 류삼, 4 남 류승이다.문제가 즉위한 이듬해에 차남 류무를 대왕으로 봉하고 3 남 류삼을 태원왕으로 했다.한문제는 두 아들을 산서 중북부에 봉해놓았는데 이는 그가 고지로 봉하여진것에 대해 중시를 돌리고있음을 충분히 설명해준다.그런데 문제는 또다시 원래의 대리지를 두갈래로 갈라놓았는데 아마 산서성에서 한사람이 왕노릇을 하면 사달이 날가봐 걱정한것 같습니다.
후세에 사학자들은 한문제를 비교적 일치하게 생각했다. 모두 한문제는 역사상 민간의 질고를 가장 관심하고 백성들의 힘을 아끼지 않는 제왕이라고 생각했다.더욱 인상적인 것은 한문제가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일반 제왕들의 화려함이 없을 정도로 소박했다는 점이다.
조서는"사물은 살아 있는 것이 곧 죽는다. 죽음은 천지의 도리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그래서 내 평생에 가장 반대했다.내가 죽은 후에 온 세상이 나를 애절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사실 생전 그에게 능묘를 지어줄 때 한문제는 기와 장기로 순장하도록 했고 금은동기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다.이 모든것은 중국고대사에서 두번째 례를 찾아내기 어려울것이다.한문제가 이렇게 하게 된 원인은 그의 개성외에 산서의 고풍스러운 민풍이 그에게 준 심각한 영향이라 할수 있다.